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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6의 게시물 표시

시대를 너무 앞서간 혁신의 그늘: 구글 글래스(Google Glass)의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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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가 극찬했던 구글 글래스는 왜 조용히 사라졌을까 2012년, 구글은 세상을 놀라게 할 차세대 스마트 기기를 선보였습니다. 안경 형태의 웨어러블 AR 디바이스, 구글 글래스(Google Glass) 였어요. 스마트폰을 대체할 게임 체인저이자 웨어러블 혁명의 선두 주자로 주목받으며 타임지 선정 '올해의 최고 발명품'에까지 이름을 올렸는데, 불과 몇 년 만에 일반 소비자 시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화려하게 등장해 쓸쓸히 퇴장한 구글 글래스,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스마트폰 시대를 끝낼 것처럼 등장하다 구글의 비밀 연구 조직 '구글 X'에서 탄생한 구글 글래스는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눈앞의 소형 디스플레이로 실시간 길 안내를 받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사진과 동영상까지 찍을 수 있는 최초의 AR 안경이었어요. 패션쇼 무대에 오르고 대중매체의 조명을 받으면서, 구글 글래스는 IT 얼리어답터들 사이에서 부와 취향을 동시에 드러내는 상징이 됐습니다. '글래스홀'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다 미래지향적인 콘셉트와는 별개로, 구글 글래스는 시장에 안착하기 위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하나도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착용자가 상대방 몰래 사진이나 영상을 찍을 수 있다는 우려가 퍼지면서, 영화관, 레스토랑, 카지노 같은 곳에서 아예 출입을 금지당하기 시작했어요. 급기야 착용자를 비꼬는 '글래스홀(Glasshole)'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사회적 반감을 샀습니다. 여기에 1,500달러(약 200만 원)라는 높은 가격표가 붙었는데도, 정작 스마트폰을 대체할 만큼 확실한 쓸모(킬 앱)는 없었어요. 짧은 배터리 수명과 발열 문제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소비자 시장 철수, 그리고 조용한 마무리 사회적 반발과 판매 부진이 이어지자, 구글은 결국 전략을 크게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5년, 구글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

사흘 만에 42조 원이 날아간 암호화폐 참사: FTX 파산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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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조 원이 사흘 만에 증발한 사건, FTX 파산기 한때 코인베이스를 제치고 글로벌 2위 암호화폐 거래소로 떠올랐던 FTX . 바하마의 화려한 펜트하우스에서 세계 금융을 주무르던 29세의 코인 왕 샘 뱅크먼프라이드(Sam Bankman-Fried, SBF) 는, 뱅크런이 시작되고 단 72시간 만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며 무너졌습니다. 수십조 원 규모의 고객 자금을 몰래 빼돌려 투자하고, 자체 발행 코인으로 돌려막기를 하던 사기극의 전말이 드러난 거예요. 세계 2위 거래소가 어떻게 사흘 만에 무너졌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MIT 출신 수재가 만든 320억 달러 신화 샘 뱅크먼프라이드는 MIT 출신 수재로, 트레이딩 업체 '알라메다 리서치'와 암호화폐 거래소 'FTX'를 연달아 세우며 시장의 거인으로 떠올랐습니다. 파격적인 수수료 혜택과 빠른 입출금, 고도화된 파생상품을 무기로 FTX는 순식간에 거래량 세계 2위 자리까지 올라섰어요. 마이애미 히트 경기장의 명칭권을 사들이고 메이저리그(MLB)를 후원하며, 워런 버핏의 계보를 잇는 '은둔의 기부왕' 이미지로 워싱턴 정가와 월가의 신뢰까지 얻어냈습니다. 한 줄짜리 기사가 드러낸 균열 2022년 11월, 암호화폐 전문 매체 코인데스크의 짧은 폭로 기사 하나가 FTX 제국의 보이지 않던 균열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FTX의 자매 투자사인 알라메다 리서치가 보유한 자산 대부분이 실제 현금이 아니라 FTX가 자체 발행한 'FTT 코인'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예요. 알라메다가 투자 실패로 막대한 손실을 입자, SBF는 FTX 고객들이 맡긴 현금과 코인 80억 달러(약 10조 원) 이상을 몰래 빼내 알라메다의 빚을 갚는 데 써버렸습니다. 바이낸스의 한마디, 그리고 72시간의 뱅크런 이 재무 위험 소식이 퍼지자, 경쟁사이자 세계 1위 거래소인 바이낸스의 자오창펑 CEO가 보유 중이던 FTT를 전량 매각하겠...

50조 원이 증발한 가상자산 참사: 테라-루나(Terra-Luna) 폭락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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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조 원이 며칠 만에 사라진 사건, 테라-루나 폭락기 한때 시가총액 세계 8위, 50조 원이 넘는 거대한 생태계를 자랑하던 국산 가상자산 테라(UST)와 루나(LUNA) .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이끌던 테라 생태계는 '연 20% 이자'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앞세워 글로벌 코인 시장의 신화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담보 자산 없이 자매 코인 간 차익거래 알고리즘만으로 1달러 가치를 유지하려던 이 구조는, 2022년 5월 단 며칠 만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코인 가치가 -99.99% 폭락하는, 가상자산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어요. 그 메커니즘과 몰락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연 20% 이자에 몰려든 사람들 테라 생태계는 미국 달러와 1:1로 가치가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 UST 와, 그 변동성을 흡수해주는 시스템 코인 루나(LUNA) 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UST를 예치하면 연 20% 수준의 고정 이자를 준다는 '앵커 프로토콜(Anchor Protocol)'에 전 세계 수십만 명의 투자자와 자금이 몰려들었어요. 한때 루나의 시가총액은 약 50조 원을 넘기며 글로벌 톱10 암호화폐에 이름을 올렸고, 탈중앙화 금융(DeFi) 시장의 중심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담보 없이 알고리즘만 믿었던 구조 테라의 핵심 결함은, 실제 달러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한 기존 스테이블코인(USDT, USDC 등)과 달리 수학적 알고리즘과 투기적 수요에만 가치를 의존했다는 점이었습니다. UST 가격이 1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루나를 새로 발행해서 UST를 사들이고, 반대로 UST가 1달러를 넘으면 UST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췄어요. 그런데 UST에 대한 대규모 매도세가 터지면서 1달러 페깅이 깨지자(디페깅), 불안해진 투자자들이 UST와 루나를 한꺼번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알고리즘이 루나 발행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면서 두 코인의 가치는 동시에 0을 향해 빨려 들어갔어요. 흔히 말하는 '데스 스파이럴'이었습...

엔터 제국 디즈니(Disney)는 왜 OTT 스트리밍 전쟁에서 적자의 늪에 빠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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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픽사, 스타워즈를 다 가진 디즈니가 왜 조 단위 적자를 냈을까 미키 마우스부터 아바타, 마블(MCU), 스타워즈까지—인류 역사상 가장 막강한 IP 제국을 구축한 월트 디즈니 컴퍼니(The Walt Disney Company) . 영화관, TV 채널, 테마파크를 하나로 엮은 막강한 캐시카우로 오랫동안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절대 1위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주도하는 OTT 격변기에 대응하려고 2019년 출시한 '디즈니플러스(Disney+)'는 가입자 확보 경쟁 속에서 조 단위의 누적 적자를 냈고, 콘텐츠를 무리하게 찍어내다 핵심 IP의 가치마저 흔들리는 역풍을 맞았습니다. 엔터테인먼트 공룡 디즈니가 OTT 전쟁에서 어떤 진통을 겪었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인수합병으로 완성한 세계 최대 콘텐츠 제국 2000년대 밥 아이거 CEO 체제에서 디즈니는 공격적인 M&A를 통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IP 공룡으로 거듭났습니다. 픽사(2006), 마블 엔터테인먼트(2009), 루카스필름(2012), 21세기 폭스(2019)를 차례로 인수하며 전 세계 영화 박스오피스를 사실상 독점했어요. 영화가 흥행하면 그 IP가 테마파크 어트랙션으로 이어지고, 다시 굿즈 판매로 연결되는 고수익 선순환 구조까지 완성됐습니다. 넷플릭스를 쫓다 만들어진 적자 2019년 디즈니플러스를 론칭하면서, 디즈니는 구독자 수를 늘리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이게 재무적으로도 브랜드적으로도 독이 됐어요. 넷플릭스를 빠르게 따라잡으려고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전용 드라마와 영화를 쏟아냈지만, 낮은 구독료와 늘어나는 마케팅 비용 때문에 디즈니플러스 부문에서만 수조 원대의 적자가 쌓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라인업을 채우려고 마블 시리즈와 스타워즈 시리즈의 양산형 스핀오프를 과하게 만들다 보니 스토리 완성도가 떨어졌고, 이게 팬덤 이탈과 '마블 피로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스스로 무너뜨린 극장과 케이블 T...

아날로그 음향 제국 소니(Sony)는 왜 MP3와 아이팟에 왕좌를 빼앗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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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맨의 소니는 왜 자기가 만든 시장을 아이팟에 내줬을까 '워크맨(Walkman)' 하나로 전 세계 길거리의 음악 듣는 문화를 바꿔놓은 전자제품의 대명사 소니(Sony) . 1970~90년대 소니는 독보적인 기술력과 감성적인 디자인으로 "소니 제품이라면 무조건 믿고 산다"는 신화를 써 내려간 세계 최고의 IT·가전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음원(MP3) 시대가 왔을 때, 소니는 자사의 저작권 사업과 아날로그 제품을 지키려다 타이밍을 완전히 놓쳤습니다. 결국 2001년 등장한 애플의 아이팟에 휴대용 음향기기 시장의 주도권을 통째로 넘겨주고 말았어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니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워크맨 4억 대, 트리니트론의 시대 1979년 출시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워크맨'은 음악을 '가지고 다니며 듣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만들어냈습니다. 누적 판매량 4억 대를 넘긴 워크맨은 소니를 세계 최정상 기업 반열에 올려놨어요. 여기에 당시 어떤 경쟁사도 따라올 수 없는 화질을 자랑하던 트리니트론(Trinitron) 컬러 TV까지 더해지면서, 소니는 글로벌 프리미엄 가전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습니다. 자기 음반사를 지키려다 발목을 잡히다 1990년대 후반 MP3가 대중화되던 시점, 소니는 기술 기업으로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소니는 하드웨어 제조사이면서 동시에 대형 음반사 '소니 뮤직'도 갖고 있었어요. 불법 복제가 쉬운 표준 MP3 포맷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소니 뮤직의 음반 매출이 타격을 입을까 봐, 소니는 MP3 지원 기기 출시를 일부러 미루거나 방해했습니다. 대신 세계 표준인 MP3를 외면하고, 자체 암호화 기술이 적용된 'ATRAC' 포맷과 전용 '메모리스틱'만 고집했어요. 음원 하나 넣고 빼기가 너무 불편했고, 소비자들은 자연스럽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

167년 스위스 금융 자존심의 붕괴: 크레디트 스위스(Credit Suisse)의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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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년 스위스 금융의 자존심이 단 며칠 만에 무너진 이유 스위스 금융의 기틀을 다진 167년 역사의 명문 투자은행 크레디트 스위스(Credit Suisse, CS) . 스위스 철도망 구축을 지원하며 탄생한 이 거대 금융기관은, 세계 최대 글로벌 자산관리·투자은행 중 하나로 오랫동안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방만한 리스크 관리, 끊이지 않는 연쇄 스캔들, 고객 신뢰 상실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2023년 3월 유동성 위기를 맞았고, 결국 경쟁사인 UBS에 강제로 인수되며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스위스 산업화의 중심에 있던 은행 1856년 알프레드 에셔가 설립한 CS는 단순한 은행을 넘어 스위스 산업화의 중심축이었습니다. 스위스 특유의 비밀주의와 정교한 금융 서비스를 무기로 전 세계 초고액 자산가들의 자금을 끌어모았어요. 여기에 CSFB(Credit Suisse First Boston) 브랜드로 월가 투자은행 시장에까지 진출하며 굵직한 딜들을 연이어 성사시켰습니다. 그야말로 정점에 서 있던 시절이었죠. 7조 원을 날려버린 몇 주 CS 몰락의 내부적 원인은 통제가 마비된 위험 투자와, 반복된 도덕적 해이였습니다. 2021년 영국 금융 스타트업 그린실 캐피털이 파산하면서 CS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곧이어 아르케고스(Archegos)의 빌 황이 벌인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가 실패하면서, 단 몇 주 만에 약 55억 달러(약 7조 원)라는 기록적인 손실을 냈습니다. 리스크 관리 부서의 경고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단기 성과급에만 눈이 어두웠던 경영진은 고위험 투자를 그대로 방치했어요. 믿음이 사라지자 시작된 대탈출 연이은 악재로 신뢰를 잃은 CS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버티지 못하는 허약한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2022년부터 2023년까지 고객 신뢰가 바닥을 치면서 자산가들의 대규모 자금 이탈, 즉 뱅크런이 시작됐습니다. 20...

마우스와 GUI를 만들고도 스티브 잡스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제록스(Xer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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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도, GUI도 먼저 만들어놓고 스티브 잡스에게 넘겨준 회사 '제록스하다(Xerox)'라는 말이 그 자체로 '복사하다'라는 동사로 쓰일 만큼, 20세기 오피스 혁명을 이끌었던 복사기 제국 제록스(Xerox) . 1960~70년대 복사기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엄청난 부를 쌓은 제록스는, IT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구소로 꼽히는 '팔로알토 연구소(PARC)'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개인용 컴퓨터,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마우스, 이더넷까지—오늘날 IT의 핵심 기술들이 세계 최초로 탄생했어요. 그런데 정작 이 위대한 기술들을 스스로 사업화하지 못한 제록스는,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에게 주도권을 통째로 넘겨주고 시대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복사기로 번 돈이 만든 연구소 제록스는 1959년 세계 최초의 평면 종이 복사기 '제록스 914'를 출시하며 유례없는 상업적 성공을 거뒀습니다. 고가 복사기 판매와 유지보수, 종이 인화 마진으로 수십억 달러의 캐시카우를 확보했어요. 이 돈으로 1970년 실리콘밸리에 세운 게 바로 PARC였습니다. 미래 오피스 환경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세운 이 연구소는, 마우스, GUI, 레이저 프린터, 비트맵 그래픽까지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어요. 1979년 12월, 스티브 잡스가 다녀갔다 IT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미팅으로 꼽히는 사건이 1979년 12월 PARC에서 일어났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제록스 주식 10만 주를 저렴하게 매수할 권리를 주는 조건으로 PARC를 방문할 수 있었어요. 잡스는 PARC의 알토(Alto) 컴퓨터가 보여준 GUI와 마우스를 보고 그 자리에서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반면 뉴욕에 있던 제록스 본사 경영진은 온통 복사기 사업에만 관심이 있었고, 이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결국 잡스는 이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가 애플 매킨토시를 탄생시켰습니다...

60조 원 유니콘의 거품과 파산: 위워크(WeWork)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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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조 원짜리 유니콘 위워크, 알고 보니 그냥 부동산 임대업이었다 공유 오피스 시장의 개척자이자 전 세계 스타트업 생태계의 상징이었던 위워크(WeWork) . 창업자 애덤 뉴먼의 카리스마와 소프트뱅크 비전펀드의 파격적인 투자를 등에 업고, 한때 기업가치 470억 달러(약 60조 원)를 자랑하던 세계 최대 유니콘이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기업공개(IPO)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불투명한 회계와 방만 경영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고, 결국 2023년 11월 미국 연방 파산법원에 파산 보호(Chapter 11)를 신청했습니다. 공유 경제라는 화려한 겉모습 뒤에 무엇이 숨어 있었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사무실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팔다 2010년 뉴욕에서 시작한 위워크는 단순한 임대업이 아니라 '커뮤니티'와 '테크 플랫폼'이라는 감성적인 브랜딩으로 떠올랐습니다. 세련된 인테리어, 무제한 맥주, 입주 기업들 간의 네트워킹 이벤트—이런 것들을 앞세워 밀레니얼 세대 창업자들을 열광시켰어요.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유치한 위워크는, 전 세계 주요 도시의 빌딩들을 공격적으로 장기 임차하며 몸집을 불려나갔습니다. 테크 기업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부동산 임대업 위워크 몰락의 핵심 원인은 불균형한 재무 구조와, 기술 기업을 가장한 과도한 몸값 부풀리기였습니다. 위워크는 건물주와는 10~15년짜리 장기 임대 계약을 맺으면서, 정작 입주 고객들에게는 월 단위 단기 임대를 제공했어요. 이 구조가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경기가 나빠지거나 팬데믹처럼 단기 고객들이 빠져나가는 순간에도 장기 임대료라는 고정비는 고스란히 회사가 떠안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위워크는 자신을 단순 부동산 전대업이 아닌 '테크 플랫폼'으로 포장했고, 그 덕에 실제 사업 구조와는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기업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상표권을 회사에 팔았던 창업자 창업자 애덤 뉴...

피 한 방울로 10조 원을 끌어모은 바이오 유니콘 테라노스(Theranos)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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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한 방울로 10조 원을 끌어모았던 회사, 알고 보니 전부 거짓말이었다 '제2의 스티브 잡스'로 불리며 실리콘밸리를 열광시켰던 19세 천재 자퇴생, 엘리자베스 홈즈. 그녀가 창업한 바이오 스타트업 테라노스(Theranos) 는 손가락 끝에서 채취한 피 한두 방울만으로 240여 개가 넘는 질환을 저렴하게 진단할 수 있다는 진단 기기 '에디슨(Edison)'을 세상에 내놨습니다. 한때 기업가치 90억 달러(약 10조 원)를 찍으며 실리콘밸리 최고의 유니콘으로 추앙받던 테라노스는, 2015년 언론의 폭로로 핵심 기술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게 드러나며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바이오·스타트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기극으로 남은 이 사건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검은 목폴라가 만든 신화 테라노스는 바늘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비싼 의료비 문제를 정확히 겨냥하며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검은 목폴라를 즐겨 입던 엘리자베스 홈즈는 스탠퍼드를 자퇴한 천재 창업자라는 이미지로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어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루퍼트 머독, 베스트바이 창업자 같은 정재계 거물들이 기술 검증 없이 홈즈의 스타성과 브랜드에 매료돼 이사회에 합류하고 막대한 돈을 투자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무도 정작 기계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거예요. 작동하지 않는 기계, 몰래 빌려온 결과 테라노스가 내세운 진단 기기 '에디슨'은 기계적 구조의 한계와 오차율 문제로 실제 혈액 분석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자체 기기로는 결과를 낼 수 없게 되자, 테라노스는 희석한 혈액을 지멘스 같은 타사의 기존 혈액 분석 기기에 몰래 넣어 검사 결과를 조작했습니다. 내부 연구원들이 데이터 오차와 위험성을 지적할 때마다, 회사는 엄격한 비공개 협약과 해고 통보로 입을 막았어요. 진실을 말하려던 사람들이 오히려 조용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셈이죠. 존 캐리루 기자의 집요한 취재 2015년, 내부 고발...

휴대폰 점유율 40%의 절대강자 노키아(Nokia)는 왜 스마트폰 전환에 실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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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점유율 40%였던 노키아는 왜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2000년대 중반까지 '모바일의 대명사'이자 핀란드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노키아(Nokia) . 전 세계 휴대폰 시장 점유율 40%를 넘나들며 14년 연속 글로벌 1위 자리를 지키던 휴대폰 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 애플 아이폰이 등장한 이후, 노키아의 무적 신화는 불과 몇 년 만에 거짓말처럼 무너졌습니다. 2013년에는 결국 휴대폰 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에 헐값으로 넘겨야 했어요. 그 충격적인 몰락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노키아 3310이 상징하던 시절 노키아는 튼튼한 내구성과 뛰어난 통화 품질, 그리고 광범위한 유통망을 무기로 휴대폰 시장을 완벽하게 지배했습니다. 노키아 3310, 1100 같은 전설적인 모델들은 누적 판매량 수억 대를 기록하며 글로벌 시장을 독점했어요. 한때는 핀란드 전체 수출액의 20% 이상,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70%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노키아 하나가 국가 경제를 떠받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심비안을 놓지 못한 대가 노키아 몰락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하드웨어 중심 사고방식과, 낡은 운영체제 심비안(Symbian)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터치스크린과 앱 생태계 중심으로 시장이 옮겨가고 있는데도, 노키아는 기존 피처폰 기반의 심비안을 고집했어요. 구조가 워낙 복잡해서 개발자들이 앱을 만들기도 매우 까다로운 시스템이었습니다. 엔지니어 중심이었던 노키아 경영진은 스마트폰의 핵심을 그저 '기기 성능'으로만 봤고, 애플이 만들어가던 '앱스토어 중심 생태계'라는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지 못했어요. 내부 경고를 묵살하고 MS와 손잡다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할 시기에, 노키아 내부의 관료주의와 느린 의사결정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사실 노키아 자체 연구소에서는 이미 터치스크린 기반 스마트폰 기술을 개발해놓은 상태였어요. 하지만 당장의 피처폰 수익에 안주한 경영진이 이 ...

디지털카메라를 최초로 개발하고도 파산한 필름 제국 코닥(Kod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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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만들고도 망한 회사, 코닥 20세기 전 세계 사람들의 특별한 순간을 기록해준 '코닥 모먼트(Kodak Moment)'. 13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코닥(Eastman Kodak) 은 필름 카메라 시장 점유율 85% 이상을 차지하며 세상을 지배했던 절대 강자였습니다. 그런데 2012년 1월, 코닥은 연방 파산법원에 파산 보호(Chapter 11)를 신청하며 필름 제국의 허망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여기서 진짜 아이러니한 대목은 따로 있어요.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한 회사가 바로 코닥이었다는 겁니다. 기술을 가장 먼저 손에 쥐고도 왜 무너졌는지,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단추만 누르세요'가 만든 90% 독점 1888년 조지 이스트먼이 설립한 코닥은 "단추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카메라의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1970~80년대에는 미국 필름 시장의 90%, 카메라 시장의 85%를 독점했어요. 카메라는 저렴하게 팔고 계속 소비되는 필름과 인화시약에서 막대한 마진을 남기는, 이른바 '프린터·면도날' 방식의 수익 구조로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1975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숨기다 코닥의 진짜 비극은 기술 변화를 몰라서 무너진 게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1975년, 코닥의 엔지니어 스티브 새송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영진의 반응은 이랬어요. "기술은 훌륭한데,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라."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면 자신들의 핵심 수익원인 필름 매출이 잠식될 게 두려웠던 거예요. 자기 손으로 만든 미래를, 자기 손으로 서랍 속에 가둬버린 셈이죠. 고마진에 취해 놓쳐버린 골든타임 필름 시장의 높은 마진율에 안주한 코닥은 디지털 전환의 결정적인 시기를 그대로 흘려보냈습니다.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열리면 필름 사업의 고마진을 더 이상 유지...

카테고리 킬러 토이저러스(Toys "R" Us)는 왜 장난감 제국에서 파산으로 내몰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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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꿈의 궁전' 토이저러스는 왜 아마존한테 발목 잡혔을까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궁전'이었고, 세계 최대 장난감 전문 유통 체인이었던 토이저러스(Toys "R" Us) . 20세기 후반, 압도적인 매장 규모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완구 유통 시장을 지배했던 이 회사가 2017년 9월, 50억 달러(약 5조 6,000억 원)가 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 보호(Chapter 11)를 신청했습니다.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던 장난감 제국이 왜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졌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축구장만 한 매장으로 시장을 평정하다 토이저러스는 특정 품목을 전문적으로 대량 유통하는 '카테고리 킬러(Category Killer)'의 원조였습니다. 축구장만 한 초대형 매장에 수만 가지 장난감을 빼곡히 채워 넣어 경쟁 유통업체들을 압도했어요. 제조업체로부터 대량으로 사들이는 만큼 가격 단가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완구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했습니다. 아마존에 온라인 주권을 넘겨준 대가 토이저러스 몰락의 결정적 계기는 온·오프라인 유통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잘못된 대응이었습니다. 2000년, 토이저러스는 직접 온라인 몰을 구축하는 대신 아마존과 10년짜리 장난감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뼈아픈 결정이었습니다. 아마존 플랫폼에 기대는 동안 정작 자체 웹사이트 개발과 데이터 분석 역량은 전혀 쌓지 못했거든요. 나중에 아마존이 계약을 어기고 다른 장난감 판매자들을 입점시키자 소송 끝에 계약을 해지하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온라인 시장을 경쟁자들에게 완전히 내준 뒤였습니다. 사모펀드가 남기고 간 빚더미 기술적으로 뒤처진 것 말고도, 회사 내부의 재무 구조 자체가 몰락을 부채질했습니다. 2005년 사모펀드(KKR, 베인 캐피털 등)가 토이저러스를 인수할 때, 회사 자산을 담보로 돈을 ...

쿼티의 제왕 블랙베리(BlackBerry)는 왜 아이폰에 밀려 스마트폰 시장에서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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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도 쓰던 그 폰, 블랙베리는 왜 아이폰에 완패했을까 2000년대 중후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월스트리트 엘리트 금융인들과 글로벌 CEO들의 손에 필수품처럼 들려 있던 폰이 있었습니다. 딸깍거리는 물리 쿼티 키보드와 강력한 보안 메시징(BBM)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블랙베리(BlackBerry, 구 RIM) 예요. 2009년까지만 해도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20% 이상을 차지하며 패권을 쥐고 있었는데, 애플의 아이폰과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몰고 온 풀터치스크린 혁명을 얕본 끝에 점유율이 0%대로 주저앉았습니다. 결국 2016년 스마트폰 자체 생산을 중단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블랙베리,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비즈니스맨의 필수품이 됐던 이유 스마트폰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블랙베리는 비즈니스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서버와 실시간으로 연동되는 기업용 이메일 시스템, 그리고 전용 암호화 보안 메신저 BBM은 기업 고객과 금융권 입장에서 대체 불가능한 가치였어요. 여기에 엄지손가락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칠 수 있는 물리 쿼티 키보드까지 더해지면서, 블랙베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체성이자 상징이 됐습니다. "배터리만 닳는 장난감"이라 불렀던 아이폰 2007년 스티브 잡스가 터치스크린 기반의 아이폰을 처음 공개했을 때, 블랙베리 경영진은 이걸 그냥 장난감 취급했습니다. 터치스크린 자판은 오타율이 높고 배터리도 많이 먹으니, 하루 종일 이메일을 쓰는 비즈니스 사용자들은 절대 물리 키보드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던 거예요. 여기에 기존의 제한된 데이터 네트워크 환경에 안주하다 보니, 대용량 데이터를 쓰는 풀 브라우징 앱 생태계가 얼마나 큰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도 전혀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독자 노선을 고수하다 앱 생태계를 놓치다 스마트폰의 패러다임이 '하드웨어'에서 '앱 생태계'로 넘어가는 그 결정적인 순...

비디오 제국 블록버스터(Blockbuster)는 왜 넷플릭스를 비웃다 파산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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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를 비웃던 블록버스터는 왜 그대로 사라졌을까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주말 저녁마다 파란색과 노란색 간판이 선명한 매장으로 비디오나 DVD를 빌리러 가는 게 전 세계 수억 명의 일상이었습니다. 세계 최대 비디오 대여 체인 블록버스터(Blockbuster) 이야기예요. 전 세계 9,000개가 넘는 매장과 84,0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며 비디오 대여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던 이 회사는, 2010년 9월 연방 파산법원에 파산 보호(Chapter 11)를 신청하며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한때 신생 스타트업이었던 넷플릭스의 인수 제안을 웃어넘겼던 블록버스터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미국인 20분 거리마다 매장이 있던 시절 1985년 첫 매장을 연 블록버스터는 바코드 시스템과 효율적인 재고 관리 기술을 바탕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미국인이 사는 곳에서 20분 거리 안에 매장을 배치한다는 전략으로 순식간에 시장을 점령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블록버스터 전체 매출의 10~15%, 연간 8억 달러 이상이 사실 비디오 반납이 늦은 고객에게 부과하는 연체료 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당장은 짭짤한 수익이었지만, 이 연체료 모델은 나중에 블록버스터의 발목을 그대로 잡게 됩니다. 5,000만 달러 인수 제안을 비웃던 그날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오판 중 하나는 2000년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우편으로 DVD를 빌려주던 신생 스타트업 넷플릭스의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가 블록버스터 CEO 존 안티오코를 찾아가, 자사를 5,000만 달러(약 600억 원)에 인수해달라고 제안했습니다. 넷플릭스는 블록버스터의 온라인 대여 부문으로 들어가 협력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블록버스터 경영진은 그저 틈새시장에 불과하다며 이 제안을 비웃고 거절했습니다. 지금 넷플릭스의 기업 가치가 수천억 달러에 달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장면도 드물 거예요. 연체료...

100년 유통 황제 시어스(Sears)는 왜 아마존에 밀려 파산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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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보다 100년 먼저 있었던 '원조 이커머스' 시어스는 왜 무너졌을까 아마존이 존재하기 훨씬 전,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인들의 삶 그 자체였던 유통 제국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어스(Sears, Roebuck and Co.) 예요. 우편 주문 카탈로그로 시작해 대형 백화점 제국을 세우고 100년 넘게 미국 유통 시장을 호령했던 시어스는, 2018년 10월 결국 막대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연방 파산법원에 파산 보호(Chapter 11)를 신청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왕좌에서 파산으로 굴러떨어진 시어스, 그 몰락의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사실 '아마존의 원조'는 시어스였다 1886년 시계 판매로 시작한 시어스는 당시 기준으로 유통 혁신의 선구자였습니다. 두꺼운 우편 주문 카탈로그를 전국의 농가와 시골 마을에 배포하면서, 소비자가 매장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생필품부터 가전제품, 심지어 조립식 주택까지 주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전자상거래의 원형이었던 셈이죠. 20세기 들어 자동차 보급이 늘어나자 교외 지역에 대형 백화점을 잇달아 열었고, '크래프츠맨(Craftsman)', '켄모어(Kenmore)' 같은 자체 브랜드를 대히트시키며 최고 유통 기업으로 군림했습니다. 유통 회사가 갑자기 금융회사가 되려던 시절 1970~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어스는 기존 유통 사업의 수익성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길이 금융업 확장이었어요. 증권사(Dean Witter), 부동산 회사(Coldwell Banker), 신용카드사(Discover)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유통과 금융을 결합한 새로운 공룡이 되려 했습니다. 문제는 경영진의 관심과 자본이 이쪽으로 쏠리는 동안, 정작 본업인 오프라인 백화점의 리뉴얼과 상품 경쟁력 강화는 방치됐다는 거예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월마트와 타겟 같은 저가 대형 할인점이 빠르게...

인터넷의 지배자 야후(Yahoo!)는 왜 구글과 페이스북에 밀려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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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도, 페이스북도 살 수 있었던 야후는 왜 다 놓쳤을까 1990년대 중후반, 웹 브라우저를 열면 가장 먼저 뜨던 화면이 바로 야후(Yahoo!) 였습니다. '인터넷 그 자체'로 불리던 야후는 한때 기업 가치 1,250억 달러(약 140조 원)를 찍으며 시대를 지배한 IT 공룡이었어요. 그런데 이 회사는 훗날 세상을 바꿀 기업들을 인수할 기회를 몇 번이고 제 발로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2017년, 결국 통신사 버라이즌에 단돈 44억 8,000만 달러라는 씁쓸한 가격표를 달고 팔려나갔어요. 인터넷의 황제였던 야후가 왜 이런 길을 걸었는지, 그리고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인수 실패 스토리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기술 기업인가, 미디어 기업인가" 야후 몰락의 첫 단추는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데서 시작됩니다. 2000년대 초, 구글이 알고리즘 검색 엔진 개발에 모든 걸 걸고 있을 때 야후는 스스로를 '미디어 포털 기업'으로 규정했어요. 콘텐츠와 광고 수익에 집중하느라 검색 기술의 중요성을 뒷전으로 미룬 겁니다. 여기에 10여 년간 CEO와 경영진이 계속 바뀌면서 회사의 장기 비전도 함께 흔들렸어요. 검색, 미디어, 모바일, SNS—전략 방향이 바뀔 때마다 기술 투자도 갈피를 못 잡았습니다. 100만 달러, 그리고 놓쳐버린 구글 야후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순간은 훗날 빅테크 거인이 될 회사들을 단돈 몇 푼 아끼려다 놓친 장면들입니다. 1998년,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만든 검색 엔진 기술을—그러니까 구글의 원형을—단돈 100만 달러에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야후는 거절했어요. 2002년, 구글이 성장하자 야후는 다시 30억 달러에 인수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구글이 50억 달러를 요구하자 이번에도 야후 경영진은 발을 뺐습니다. 2006년에는 갓 등장한 페이스북을 1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거의 합의까지 갔어요. 그런데 야후 주가가 폭락했다는 이유로 인수액...

77년 세계 자동차 1위 GM(General Motors)은 왜 2009년 파산 보호를 신청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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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간 세계 1위였던 GM은 왜 2009년 파산 보호를 신청했을까 1931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77년 동안 단 한 번도 세계 자동차 판매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회사가 있습니다. 바로 제너럴 모터스(GM) 예요.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 자본주의 그 자체를 상징하던 이 거대한 공룡 기업이, 2009년 6월 결국 연방 파산법원에 파산 보호(Chapter 11)를 신청했습니다. 77년 동안 세계 정상을 지킨 자동차 제국이 왜 허망하게 침몰했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유산 비용'이라는 짐 GM 몰락의 가장 근본적인 내부 원인은 수십 년간 쌓인 '유산 비용(Legacy Costs)' 이었습니다. GM은 전미자동차노조(UAW)와의 연례 협상에서 파업을 피하려고, 현역과 퇴직 임직원은 물론 그 가족들의 평생 의료보험과 연금까지 회사가 전액 부담하겠다고 합의해왔어요. 이게 계속 쌓이면서 2000년대 중반에는 GM이 만드는 차 한 대당 약 1,500~2,000달러(약 200만 원 이상)가 순수 제작비가 아니라 퇴직자 의료비와 연금으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됐습니다. 일본이나 한국 경쟁사들과 비교하면 시작부터 가격 경쟁력이 밀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기름값 쌀 때 대형 SUV에 올인한 대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기름값이 저렴했던 시절에 GM은 이익률 높은 대형 SUV와 픽업트럭(허머, 쉐보레 타호 등)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그사이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프리우스 같은 하이브리드와 고연비 소형차 개발에 속도를 냈어요. GM은 당장 눈앞의 수익에 취해 고연비 차량 개발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2007~2008년 국제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를 돌파하며 치솟자, 기름을 많이 먹는 GM의 대형 차종들은 매장에서 외면받기 시작했고 재고는 기하급수적으로 쌓여갔어요. 금융위기라는 마지막 ...

158년 역사 월가의 거인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는 어떻게 세계 경제를 삼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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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년 된 월가의 거인이 전 세계 경제를 무너뜨린 날 2008년 9월 15일, 전 세계 금융 시장이 그야말로 얼어붙었습니다. 미국 4대 투자은행이자 158년 역사를 자랑하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가 6,130억 달러(약 700조 원)라는 어마어마한 부채를 안고 파산 보호를 신청했거든요. 미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월가 그 자체였던 회사가, 어떻게 단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전 세계적인 대폭발로 만들었을까요?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면화 상점에서 월가의 공룡까지 1850년, 독일계 이민자 리먼 형제가 앨라배마주에서 작은 면화 거래상으로 시작한 게 리먼 브라더스의 출발이었습니다. 이후 미국 철도 산업 건설과 20세기 초 대기업들의 자금 조달을 주도하며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성장했어요. 수많은 경제 위기를 버텨온 이 회사가, 2000년대 들어 CEO 리차드 풀드의 지휘 아래 완전히 다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풀드는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는 레버리지(부채) 확대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리먼은 당시 한창 뜨거웠던 부동산 열풍 한가운데로 그대로 뛰어들었어요. 탐욕이 키운 서브프라임 모기지 버블 2000년대 초반 이어진 저금리 기조 속에서 미국 주택 시장은 역사적인 거품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리먼은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어요. 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담보대출, 즉 서브프라임 모기지 상품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용도 낮은 모기지 채권들을 복잡한 금융 공학으로 뒤섞어 만든 고위험 파생상품(CDO)을 수백조 원 규모로 발행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걸 자본금의 30배가 넘는 대출과 채권으로 떠받쳤습니다. 시장이 오르는 동안은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 구조였지만, 반대로 시장이 꺾이는 순간 회사 전체를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는 시한폭탄이기도 했어요. 거품이 터지고, 구제금융마저 거부당하다 2006년 이후 미국 기준금리가 오...

일본 IT의 자존심 도시바(Toshiba)는 왜 분해되어 상장 폐지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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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일본" 도시바는 왜 140년 만에 증시에서 사라졌을까 최초의 노트북, 최초의 낸드플래시,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140년 넘게 '기술의 일본'을 상징해 온 회사가 바로 도시바(Toshiba) 였습니다. 한때 세계 노트북 시장과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던 이 거인이, 2023년 말 증시에서 조용히 상장 폐지되고 사모펀드에 팔려나갔습니다. 분식회계 스캔들과 원전 사업 실패라는 두 개의 악재가 동시에 터진 결과였어요. 기술력만큼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도시바가 왜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졌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가 만든 조작의 늪 도시바의 몰락은 사실 회사 안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2000년대 후반, 역대 CEO들 사이의 권력 다툼과 실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경영진은 각 사업 부서에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이익 목표를 내려보내기 시작했어요. 사내에서는 이걸 'Challenge'라고 불렀습니다. 이름부터가 압박이었죠. 부서장들은 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이익을 부풀리거나 손실 계상을 다음 분기로 미루는 식으로 숫자를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걸 걸러내야 할 감사위원회와 이사회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7년에 걸쳐 1,500억 엔(약 1조 5,000억 원) 규모의 분식회계가 조직적으로 자행됐습니다. 더 치명적이었던 한 방, 웨스팅하우스 인수 사실 분식회계보다 도시바를 더 벼랑 끝으로 몰아간 건 따로 있었습니다. 2006년, 도시바는 미국 원자력발전 설비 업체인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 를 시가의 2~3배에 달하는 54억 달러(약 6조 원)에 인수했어요. 원전 사업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가 터지면서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뜨거웠던 원전 열풍이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안전 규제가 대폭 강화되면서 공사...

230년 전통의 영국 베어링스 은행은 어떻게 28세 딜러 한 명에 무너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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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년 역사의 은행이 28세 트레이더 한 명 때문에 통째로 날아갔다 이 정도면 그냥 "말이 안 된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영국 여왕의 자산을 관리하고 나폴레옹 전쟁 자금까지 댔던 230년 역사의 투자은행,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은행 중 하나였던 이곳이 1995년, 단 한 명의 젊은 트레이더가 낸 파생상품 손실 때문에 단돈 1파운드에 팔려나갔습니다. 한 사람의 오판이 어떻게 230년짜리 금융 제국을 무너뜨렸는지, 그 전말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등장한 '신의 손' 1992년, 베어링스의 25세 청년 닉 리슨(Nick Leeson) 이 싱가포르 국제화물거래소(SIMEX)의 선물 거래 책임자로 발령받았습니다. 리슨의 원래 임무는 도쿄와 싱가포르 거래소 간 주가지수 선물 가격 차이를 이용해 위험 없이 수익을 내는 차익거래 였어요. 이론상 거의 무위험 거래죠. 그런데 리슨이 여기서 남다른 감각을 보여주면서, 은행 전체 이익의 수십 퍼센트에 달하는 수익을 혼자 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베어링스 내부에서 '신의 손'이라 불리는 스타 트레이더가 됐어요. 이때까지는 그냥 성공 스토리였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죠. 손실을 숨기려고 만든 비밀 계좌 '88888' 화려한 수익 뒤에는 위험천만한 투기가 숨어 있었습니다. 1992년, 하급 직원의 작은 실수로 2만 파운드 손실이 발생하자, 리슨은 이걸 회사에 보고하는 대신 숨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비밀 계좌 '88888' 이었어요. 손실을 메우려고 리슨은 본래 업무였던 차익거래의 선을 넘어, 닛케이 225 지수의 방향을 예측해서 베팅하는 고위험 선물 투기로 발을 들였습니다. 예측이 틀릴 때마다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때마다 리슨은 포지션을 두 배로 늘리는 '마틴게일 전략'으로 맞섰습니다. 지는 판에 계속 판돈을 올...

하늘의 절대자 보잉(Boeing)은 어쩌다 추락했는가: 원가 절감과 주주가치가 불러온 신뢰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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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이 아니면 안 탄다"던 그 회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때 "If it's not Boeing, I'm not going"이라는 말이 진심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00년 넘는 역사, 압도적인 기술력, 세계 최대 항공기 제조업체—보잉은 그야말로 하늘을 지배하던 공룡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연속된 추락 사고, 기체 결함, 부실 제조 스캔들까지 겹치면서 브랜드 신뢰는 바닥을 찍었습니다. 절대 강자였던 보잉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엔지니어의 회사에서 재무제표의 회사로 보잉의 몰락을 이해하려면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경쟁사였던 맥도넬 더글라스 와의 합병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요. 합병 전 보잉은 엔지니어들이 주도하는 회사였습니다. "비용이 얼마가 들든 최고로 안전한 비행기를 만든다"는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죠. 그런데 맥도넬 더글라스 출신의 재무 중심 경영진이 자리를 채우면서 회사의 DNA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엔지니어링의 정밀함보다 분기별 재무제표가 우선순위에 올랐고, R&D에 투자해야 할 수백억 달러의 현금은 주가 부양을 위한 자사주 매입에 쏟아부어졌습니다. 핵심 부품 제작과 설계는 수많은 외부 업체로 흩어졌고, 그 과정에서 보잉은 스스로 품질 제어 능력을 놓아버렸어요. 경쟁사에 쫓기다 만든 땜빵, 737 MAX 2010년대 초, 에어버스가 연비 좋은 A320neo로 시장을 흔들자 보잉은 초조해졌습니다. 신형 기종을 새로 개발할 시간도 돈도 아까웠던 보잉은 대신 기존 효자 모델인 737을 무리하게 개량하는 길을 택했어요. 그게 바로 737 MAX 입니다. 개발 기간과 비용을 아끼려고 기존 프레임에 훨씬 크고 효율적인 엔진을 억지로 끼워 넣었습니다. 그러자 큰 엔진 때문에 기체가 위로 쏠리려는 물리적 문제가 생겼고, 보잉은 이걸 소프트웨어로 땜질하기로 합니다...

미국 7대 기업 엔론(Enron)은 어떻게 한순간에 증발했는가: 회계 부정과 오만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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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론은 어떻게 90조 원짜리 회사를 하루아침에 증발시켰을까 솔직히 이 정도로 무너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포춘지가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뽑았던 회사, 시가총액 700억 달러(약 90조 원)를 찍으며 미국 7대 대기업 반열에 올랐던 회사가 엔론이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몇 달 사이에 사상 최악의 파산 신청서를 내고 그대로 사라져버렸어요. 월가가 그렇게 떠받들던 회사가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었을까요? 파고들어 보니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소름 돋는 구조가 있더군요. 파이프라인 회사에서 '에너지를 파는 금융사'로 엔론은 원래 1985년 텍스스타와 휴스턴 내추럴 가스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그냥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운용 회사였습니다. 그런데 CEO 제프리 스킬링이 들어오면서 판이 완전히 바뀌었죠. 에너지를 '물건'처럼 파는 대신 '금융 상품'처럼 거래하기 시작한 겁니다. 날씨 리스크를 헤징하는 파생상품, 전력, 심지어 브로드밴드 대역폭까지—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죄다 거래 상품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마침 인터넷 붐과 시기가 딱 맞아떨어지면서 주가는 계속 치솟았고, 사람들은 엔론을 그냥 에너지 기업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가는 IT·금융 융합 기업"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듯한 혁신 스토리죠.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화려한 실적 뒤에 숨어 있던 회계 트릭 엔론의 실적이 그렇게 좋아 보였던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시가평가 회계법(Mark-to-Market Accounting)' 이라는 걸 완전히 악용했거든요. 이 회계법 자체는 단순합니다. 미래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수익을, 계약을 맺는 그 시점에 바로 장부상 이익으로 잡아버리는 거예요. 엔론은 장기 계약 하나를 체결할 때마다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미래 수익 추정치를 뽑아내서 그걸 그대로 실적에 넣었습니다. ...